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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전력 60분

[HQ 아키스가] 당신이 선물한 책을 읽었다

by 아르니 2017. 8. 15.

*8월 둘째주 주간 스가른 주제 '낡은책장,먼지앉은책' 참여했습니다

 

 

 


 

 

 

그 집, 코우시가 사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오른 편으로 돌면 그의 아침 맞이가 고스란히 남은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는데 그를 등지고 맞은편 벽을 바라보면 책장이 우두커니 서있다. 빽빽하게 꽂히다 못해 자리를 찾지 못하고 누워 올려서마저 가득 채운 책의 무게에 용케도 무너지거나 휘지 않은 책꽂이는 다만 옆구리에 종이 귀퉁이와 함께 남은 테이프 조각이나 떨어진 흔적, 변색된 고정용 나사에서 그가 겪은 시간을 추측해볼 따름이다.


책 한 권을 빼 들었다. 책머리에 먼지는 누렇게 앉아 있었지만 닦아내고 보면 펼친 흔적도 없는 새 책이었다. 이번 방학동안은 가진 책중에 안 읽은 것을 모조리 독파해야 겠다는 다짐 하에 뽑은 첫번째, 어느 시인의 여행 수기였다. 좋아하는 시인은 커녕 그의 시를 읽어본 적도 없었는데 그의 여행 수기는 코우시의 책장에 오랜시간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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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정의 방향


시인은 아침 햇살 아래서 배회하다 어느 커플을 발견한다. 키스를 청하는 여자와 그에 응하지 않는 남자의 관계를 안타까워 한다. 남자의 마음은 이미 돌아선 듯 간곡하게 불러도, 따라가도 돌아봐 주거나 눈을 맞춰 주지 않았다. 그들의 사이가 단절되고 만 것이다.


어쩌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그들의 관계 또한 스가와라 코우시의 일방적인 구애로 보였을지도 몰랐다

즐겁자고 맺은 관계에서마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는 않다며 몸이 원하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달라 붙던 그와 달리 신경쓸 것도 무서울 것도 많은—이를테면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지만 시니컬한 남동생이 보고 뭐라고 할지 두렵다든가—그사람은 스킨십을 꺼리는 편이었으니까.


"스가와라씨, 이건 괜찮아요?"

"글쎄요……. 다른 것도 봐야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츠키시마 아키테루는 그 남자와 달리 누구보다도 스가와라를 살피고 맞춰줬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달랐다. 좋아하는 음식은 완전 매운 마파두부 스페셜, 최근의 고민은 요즘 일학년 애들이 자기보다 크다는 것 외에 좋아하는 것도 모호하고 싫어하는 것만 많은 스가와라였으므로 매번 위장을 긁어내는 마파두부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두 사람의 데이트에서 아키테루의 고민이 컸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기다리다가 아까 어떤 커플이 같은 운동화 신고 가는 걸 봤는데, 귀엽더라구요. 모자,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해요?"

"유치하게 커플템은 무슨, 츠키시마씨는 눈에 띄는 게 싫어서 길에서 손도 못 잡는다면서요."

"그건……! ……아직 기분 별로예요?"


눈썹을 팔(八)자로 만든 그는 스가와라를 건물 사이 좁은 틈으로 데려가 아주 잠깐 입을 꼬옥 갖다댔다가 떼고는, 당분간 이걸로 충전한 셈 쳐달라며 울상을 지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가끔은 괜히 더 부루퉁한 척을 하게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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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에 빠진 그 순간


아무래도 전문을 읽어보는 게 좋지 않겠어, 스가와라가 서점에 들른 이유였다. 교과서에서 다루는 작품이 한두 가지도 아니었지만 이번 시험에서 비중이 크다는 작품인데 전후가 생략된 본문에 의문이 남았던데다 공부나 배구를 하고 남은 시간에는 문학작품을 즐겨 읽던 그였으므로 구매를 결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베스트셀러 도서들이 한 권 한 권을 돋보이는 디스플레이로 선반 위에 놓여 있었고, 실용서적이 즐비한데다 출간된지 오래일 교과서 작품이 여기 있을리 없어 어깨를 으쓱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찾으시는 책 있으신가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굳이 따지자면 중고음 정도의 자상한 음성의 주인은 흔히 훈남이라고 불릴 듯한 외모였다. 키도 큰 편인데다 근육 줄기가 보기 좋게 자리잡았으며 계란형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이, 사실 스가와라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쩐지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그만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달라고 손짓해 귓가에 대고 말하기를,


"<당장 내 구멍에 xx해 줬으면 좋겠어>라는 만화책 혹시 어딨나요?"


서점 유니폼인 앞치마를 착용한 남자의 흐트러진 갈대같은 베이지색 머리 사이로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 그게, 저쪽 만화코너에, 따라 오시면, 하고 더듬더듬 안내했다. 놀리고 싶어 져서 아무 책이나 보이는 대로 불렀을 뿐인데 그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스가와라를 안내했다. 걸음이 조금 빨랐다. 벗은 남자 둘이 한눈에 보기에도 야한 표지를 집어들기 전에 스가와라가 외쳤다.


"죄송해요! 다른 책 찾고 있었어요. ……츠키시마씨."


기대한 만큼 귀여운 반응을 보여준 그의 이름은 왼쪽 가슴 위 명찰에 따르면 츠키시마 아키테루로, 스가와라의 배구부 1학년인 후배와 같은 성씨였다. 이어 스가와라가 대는 작가와 책 제목에 그는 안도감을 넘어 반가운 기색으로 앞장서 책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작가 작품 좋아하세요? 전 다 재밌게 읽었거든요, 들떠서 조잘거리는 모양이 퍽 들을만 해서 속으로는 오늘 사는 책 말고도 몇개 더 읽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세번째 책을 사러 와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


나중에야 그때 장난 너무 변태같지 않았냐고, 어떻게 싫어하지 않을 수 있었냐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그도 마찬가지로 첫눈에 반해 있었고, BL 찾는 남자애라니 사실 약간의 희망 아닌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고 민망해하며 대답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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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색깔의 이름


이런 색깔 좀 더럽지 않아요.

등받이에서 점점 미꾸러져 꼬리뼈가 의자 시트에 닿을 지경인 스가와라가 뜨겁지 않은 카푸치노의 거품 찌꺼기를 빨대로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 컵 색은 예쁜것 같은데?"


노란색 머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노란 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것 말고도 더 있는데, 부끄러워하는 뒷모습에서 삐져나온 노랑, 눈 동그랗게 뜨고 삐약거리는 노랑, 꽃잎에 앉은 이슬에 비친 노랑, 티없이 순수한 노랑, 같은 것들.


"그거 그냥 타이틀만 바꿔 달은 노랑 아니에요?"


그냥 대놓고 남동생 예찬이 아닌가, 스가와라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엉덩이를 당겨 세워 제대로 앉았다.


"그런가……."


컵을 쥔 아키테루의 손가락이 금세 흥건하게 젖었다. 유리잔에 든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다 녹아 컵에 낀 성에가 뭉쳐 물방울이 될 뿐이었다.


"좀 더 있어."


굽기 전의 사기처럼 보드라운 회색, 도시를 떠올리는 세련된 시멘트색, 감히 만질 수 없이 고귀한 은색.


간지러우니까 아부 떨지 말라고 했다. 늪색으로 비비 꼬여서 괜히 아니꼬왔으므로.


감정 소모에 지쳐가던 어느날, 그가 책을 선물했다. 책이라기엔 무거워 의아해 했더니 출간 이벤트로 사은품이 붙어있었다더라. 짐이 는 게 귀찮아서 궁시렁 거리며 집에 와 열어 보니 그 증정품이라는 게 커플 악세사리였다. 커플 아이템 같은 것 그리도 부러워했으면서 바보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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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시 만난 그대여


시인의 여행 친구 A가 반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자신을 수학자라 소개하고, 초대받은 저녁식사에서 배고파서 한 거짓말이었음을 실토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마음을 정리한 A는 이후 다른 선배의 사진작품 전시를 돕다가 처음 만났던 그녀의 사진을 발견하고 주저앉는다.


극적인 이야기에 갖다 붙이기는 민망하지만 스가와라가 SNS에서 아키테루의 계정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약간의 호기심으로 엿본 그의 삶은 평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츠키시마 아키테루의 동생이자 스가와라의 배구부 후배인 케이와 딸기 쇼트 케이크 사진에는 츠키시마, 즉 케이의 부끄러운 툴툴거림이 들리는 것만 같아 웃음을 흘렸다. 츠키시마 형제가 대여섯 살쯤 되어보이는 케이의 키만 한 공룡 봉제인형을 껴안고 잠든 아날로그 사진을 다시 찍어 올린 데서도, 대학생이 된 아키테루가 친구들과 밥을 먹다 말고 찍힌 셀프 카메라에서도 한결 같다고 느꼈다. 우리 서로가 없으면 밥도 못 삼킬 것처럼 여겼던 게 무색하게도 잘 살고 있는가 보다고.


되돌아가기 버튼을 누르려다가 문득, 츠키시마 형제의 아날로그 사진이 기대 선 화분에 눈이 갔다. 틀림없이 스가와라와 교환한 미니 선인장이었다. 연애는 식물 기르듯이 해야 한다고, 적당한 애정을 주는 법을 익히자면서 상대의 성이 아닌 이름을 붙인 선인장을 그는 여지껏 건강하게 길러 온 것이다. 스가와라의 아키는 진작에 말라죽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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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당신과 당신 요리의 냄새


"스, 가와라 군, 저기, 나 이렇게 보여도 연상이고, 성인이라고? 괜찮은 거야? 부모님 오시면……."


스가와라의 부모님이 양쪽 다 늦는 날이었다. 애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찌르니 과장스럽게 허리를 움켜잡고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길래 뺨에 키스했다. 괜찮대도, 아키 형만큼 안전한 남자가 또 어딨다구. 그는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그야, 그렇지?


시간이 마침 여섯 시 반이었다. 내가 요리할 테니까 스가와라는 쉬고 있어, 연상의 능력을 보여줄 테니까! 소매를 걷어 붙이고 기세 좋게 소리친 그는 바로 다음 순간 물어 왔다. 근데, 조리기구 어디서 꺼내면 돼?


가방을 놓고 교복을 갈아입고 나서 보니 매일 밥을 먹으며 보아온 익숙한 공간이 그의 존재 하나로 완전히 생소하고 전혀 낯설게 느껴져 숨쉬는 것조차 멈추었다.


"아직 잠깐, 어?"


허리에 팔을 두르자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등에 기대면 섬유 유연제 냄새와 그가 쓴 샴푸 냄새가 흘러들었다. 등에서 얼굴을 떼면 곧장 밀려드는 고소하고 짭쪼름한 반찬 냄새. 이번에는 그가 뒤돌아서 입술을 훔치고, 맵게 조린 멸치 볶음을 입에 넣어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라고.


양파 몪는 냄새를 사랑한다는 시인의 고백을 읽고 문득 그 냄새가 활자 위에 감도는 것은 그리움에 섞인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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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겨진 사람


그만 만날까, 수험 공부에 좀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아.

사실은 덧붙이나 마나한 핑계일 뿐임을 너도 나도 아는 그 선언에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나, 잘 기억나지가 않는다.

이럴 줄 알았다며 체념을 했던가

아무리 너라도 도가 지나쳤다며 모른체 시선을 돌렸던가

아직은 이르다며 슬퍼했던가 아니면

꼭꼭 눌러담아 환히 웃으며 그래, 라고 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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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야 당신이 선물한 책을 읽었다. 당신만큼이나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이 책의 어디가 그리 좋았길래, 당신 이상이 여기 어디에 있길래 제게 선물했느냐고 질타하고 싶은 마음은 책의 마지막 장과 함께 덮어 닫았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여기에 남은 당신의 흔적을 읽고 뒤늦게 빈자리를 느낄 저를 미리 읽었느냐고.






피드백 : @harpy_crte 또는 Ask.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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