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차 창작/하이큐!!

[아카스가] 거짓말

by 아르니 2019. 12. 9.

2019년 12월 21일 하이큐 세터즈 배포전 '돌아온 사령탑' 에서 발매되는 아카스가 앤솔로지 수록작 샘플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서늘하게 들렸다. 내다보거든 호수 표면이 먹구름을 닮아 검었고 지면 위에는 엷은 안개가 드리워 근경이 창백했다. 날씨가 꽤 추워졌으니 따끈한 나베가 먹고 싶었다. 타키가와는 편의점에서 산 우산을 펼치며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우산살에서 튀어 나간 물방울이 누군가의 발치에 떨어졌다. 거기 그 애가 있었다.

 

***

 

어느 가을날 태양이 가장 높이 떴을 때, 다섯 살짜리 아카아시 케이지의 눈앞에 새까만 조각이 떨어졌다. 낙엽인가 싶었더니 검은색 깃털이었다. 하늘에는 지나가는 참새 한 마리 없었고 아카아시 가족이 사는 전통식 가옥 주변에는 높은 건물은커녕 주택조차 띄엄띄엄 서 있으니 어디 쌓여있다 떨어졌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애초에 들새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크기도 했다. 흑요석이나 블랙 다이아몬드처럼 검디검은 깃털 표면은 비눗방울처럼 알록달록하게 빛을 반사했다. 그날 밤 원정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그 깃털을 보이며 자랑했다. 아버지는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었는지 무척 궁금해했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베개 밑에 넣어 두었던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실력 있는 요괴 사냥꾼이었으니 그 깃털의 주인을 사냥했던 것이겠지, 나중에야 그렇게 생각했다. 미련인지 추억인지 자꾸만 떠오르는 게 언제 한번 시원하게 다시 보고 만져 봐야 씻겨 나갈까. 대신 손에 든 샤프펜슬을 까딱거리는데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알고 보니 분노한 족제비 요괴가 그 애 정신에 파고들었다는 거야.”

매번 스레딕 같은 데서 본 괴담이나 떠들어대는 니야마의 새된 음성이 유난히 아카아시의 귀를 찔러 들곤 했다. 그 주변 아이들은 그게 뭐가 좋다고 모여들어 같이 떠들고 웃거나 야유했다.

“야, 쟤도 뭐 하나 달고 사는 거 아니냐? 곱슬머리의 저주라든가.”

어울리지도 않는 프라다 로퍼를 신은 발을 다리 꼬아 흔들며 들으란 듯이 제 친구 놈과 속닥거리기까지 하는 놈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애가 있다 하면 교실의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 태도도, 애호가를 자칭하면서 요괴나 영을 가벼운 흥밋거리로 소모해 버리는 경박한 말투도 무엇하나 거슬리지 않는 게 없었다. 이듬해 반 배치에서는 꼭 다른 반으로 갈라지기를 바랐다.

 

전철로 한 시간 반 걸려 창밖으로 호수를 건너고 맨션 촌을 지나 겨우 의뢰인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의뢰인의 소꿉친구이자 동거인인 타키가와 씨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청년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부터인가 온종일 흐리멍덩한 채 몸을 일으키지도, 잠들지도 않는다고 했다.

“탓키가 이렇게 되기 일주일인가 열흘쯤 전에 비가 내렸었죠. 그날 어떤 꼬맹이를 집에 데려왔어서 기억합니다. 댁네 아드님이랑 비슷한 또래, 한 열네다섯 살 됐을 거예요. 전 저녁 알바 나가느라고 그걸 주의 깊게 보진 않았고, 쇠고랑 찰 일 있냐고 놀리긴 했지만 워낙 건실한 녀석이었다 보니 사정 있는 애 비나 피하게 해 주려고 데려왔나보다 했죠. 길에서 비 맞는 강아지 같은 거 보면 꼭 데려와서 돌보다가 주인 찾아 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탓키가 이렇게 되고, 저는 자꾸 그 애가 마음에 걸려요. 다음 날 애 보내 놓고 퇴근하더니 꼬마가 줬다는 유리구슬을 보여주면서 좋아했거든요. 빛을 통과시킬 때 반짝거리는 게 그렇게 예쁘다고. 그런 걸 아이처럼 좋아할 녀석이 아닌데. 지금도 그걸 손에서 절대 안 놓고요.”

아카아시의 어머니, 요이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타키가와 씨를 살펴보니 눈곱이 끼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데다 연신 마른 입술을 적시는 모습에 몸과 마음이 건강했다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흐리멍덩한 눈동자의 초점은 손바닥 안에 굴리는 새까만 구슬 언저리에만 머물렀다.

“저 구슬, 지금은 검지만 원래는 투명했을 거다. 지금은 타키가와 씨의 정기精氣를 훔쳐 모아서 색이 변했을 테지.”

요이노는 아마도 그 아이가 사람의 모습에 큰 날개로 모습을 숨기는 히토가라스人烏일 것이라 했다. 그들은 보통 인간 사이에 섞여 큰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지만, 일정한 수준의 형태를 갖추기 전까지 어린 녀석들은 인간의 연민을 자극해서 홀리고 정기를 흡수해서 성장했다. 그들은 어린 개체인 만큼 위험하게 인간과 직접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구슬과 같은 매개체를 이용해 정기를 얻어낼 수 있었다. 따라서 타키가와 씨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그 매개체인 구슬을 떼어내야 했다.

날이 완전히 저문 뒤에 의식을 시작했다. 케이지는 타키가와의 방 문턱에 섰다. 축축한 눈가가 뻐근했다.

“홀리는 요물을 상대할 때는 마음을 더 단단히 먹어야 해, 케이지. 잠시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아무렴요.”

아카아시는 어깨를 으쓱하고 구렁이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꼈다. 타키가와 씨의 구슬을 빼앗되 자신의 정기를 흡수당하지 않기 위한 차단막이었다. 타키가와 씨에게서는 구슬을 빼앗으려 하니 자기 새끼를 지키려는 짐승이라도 되는 양 손을 뒤로 숨기며 노려보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는 탓에 실랑이를 벌였다. 요이노가 합세해 새끼줄로 몸을 포박한 뒤에야 겨우 떼어낸 구슬을 손에 쥔 그대로 장갑을 뒤집어 묶었다. 타키가와 씨는 구슬에게서 벗어남과 동시에 잠들었다.

정화수를 담은 물그릇을 방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 사방에 촛대를 세워 불을 붙였다. 주술로서의 의미에 더해 너무 밝은 빛에는 히토가라스가 쉬이 형체를 숨기니 모습을 드러내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놈이 날개를 꺼내고 완전히 펼칠 때까지는 눈 깜짝할 시간밖에 안 걸린다. 몸을 숨기지 못한대도 강해지면 골치 아프니까 순간을 노려야 해.”

요괴와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당장 죽이지 않을 것처럼 꾸몄을 뿐이었다. 케이지는 붉은배새매가 목욕한 진흙을 말려 다시 곱게 빻은 모래 상자를 정좌로 앉은 허벅지 위에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이노는 물그릇 앞에 정좌한 채로 기도를 외웠다. 사어가 섞여 정확히 해석하기는 어려우나 요지는 옛적 가문의 명망이 높았을 적에 부렸던 식신에게 당신 주인의 후손이 청하노니 난폭한 요물에게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보호의 힘을 빌려달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다음 물그릇에 구렁이 가죽으로 봉했던 유리구슬을 떨어트렸다.

수표면에 일어난 동심원 모양 물결이 바깥으로 퍼져 촛불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맨발은 바라보는 사람의 눈을 얼릴 것처럼 창백했는데 그 위로는 아카아시나 요이노와도 다름없이 보통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의뢰인의 말을 듣고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스무 살 전후쯤 돼 보이는 체격과 얼굴인데 머리카락은 할아버지처럼 하얗게 세고 눈동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깊었다.

“요괴시여, 그대의 포식에 그대에게 온정을 배풀었던 이가 많이 쇠약해졌습니다. 이 이상 탐식하다가는 죽고 맙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다 자랄 수가 없는걸.”

“탐식을 중단하시거든 대신 아직 더러워지지 않은 순수한 영혼이 흘린 눈물을 드리겠나이다.”

히토가라스는 요이노가 내민 작은 유리병을 보려고 몸을 기울였다. 아카아시가 모래 상자를 힘주어 눌렀다. 아카아시의 눈물을 흡수하고 날개에 요력이 퍼지기 전에 놈을 마비시키는 모래를 뿌려서 화멸부로 태워야 했다.

새까만 날개는 검은 동시에 오색으로 찬란했다. 봄날 피어난 새순에 맺힌 이슬이 햇빛을 깨트려 오롱오롱 빛나는 것처럼. 아카아시는 멈추어 눈을 떼지 못했다. 가을날 하늘에서 떨어진 흑요석 같은 깃털, 꼭 만져보고 싶었던 그것이 눈앞에 있었다.

“케이지!”

요이노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상자를 손에서 미끄러트렸다. 소리 난 곳에 모래가 흐른 것을 본 히토가라스가 몸을 부풀렸다.

“저것은, 어서 치우지 않으면, 이런 괘씸한……!”

그것은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바뀌었다. 날개로부터 전이되는 날카로운 깃털이 등을 뒤덮고 눈이 검게 물들어…….

아카아시가 뒤늦게 모래를 뿌리자 그것은 광폭한 모습으로 몸부림을 쳐 화멸부조차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혀를 찬 요이노는 품에서 은도를 꺼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히토가라스와 요이노 둘 다 피를 흘렸다. 요이노의 칼은 빗나가서 요괴의 미간을 찌르는 대신 왼쪽 눈가를 베었고 맹금류의 발톱처럼 자라난 히토가라스의 손이 요이노의 목을 움켜쥐었다.

“자, 잠깐, 요괴시여!”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었다. 달려들었다가는 저 요괴가 어미와 저를 죽이는 것보다 늦을 터이고 가만히 둔다고 살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닌 터, 요괴가 수긍할 만한 거래를 제시해야 하는데.

“저의 피를 드릴 테니 날개를 한 쌍 더 펼치시는 대신 부디 그 노여움을 푸시어 우리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너를 흡수하더라도 이 년을 살려 두면 또 나를 죽이러 올 테지.”

“아니요, 목숨을 살려주시는 대가를 언약하겠습니다. 저를 요괴님께 제물로 바치되 우리 가족은 앞으로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어긴다면 저주받아 생을 마감할지니 진실함을 맹세합니다.”

히토가라스가 광폭해진 모습을 처음 나타났던 대로 되돌리자 아카아시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모래를 부었다. 요괴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뭐야, 말이 달라, 언약했잖아!”

요이노의 손에서 은도를 거두어 요괴의 날개 뿌리를 자르자 방 안 가득 비명이 울렸다. 금줄로 그의 몸을 묶고 요동치는 날개 단면에 봉인부를 붙였다.

“제가 언약을 어겼다고 생각하십니까?”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 그는 얌전해진 날개를 내려두고 어머니를 살폈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시기를 정하지도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앤솔로지 관련 정보 확인 및 구매 문의는 트위터 계정(링크)에서 가능하십니다.

 

'2차 창작 > 하이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비님 생일선물 엔노스가  (0) 2018.10.28
트위터 백업  (0) 2018.10.28
[츠키야치]몽정  (0) 2018.03.22
[스가]어렴풋한 꿈의 조각  (0) 2018.03.19
하이큐 로그  (0) 2018.01.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