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스가른 전력 주제 '인어'로 참여했습니다.
그 인어의 그림자는
아르니
자, 그럼 내 차례인가? 좋아. 내가 아오모리에서 장사치하던 때 얘기야. 그 때 나랑 거래하던 조개잡이가 있었는데 그녀석, 괴짜였거든. 마츠카와라는 청년이야.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보내면서, 물이 빠지면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물이 차면 뭍에서 그림을 그리더라고. 나같으면 배 타고 바다에 나갔을텐데. 아, 뭐 그래서 일어난 이야기지만.
5월이었을걸? 하늘도 파랗고 날씨도 쾌적했거든. 해는 따숩고. 그 어느 날 맛층이(아, 내가 그녀석을 이렇게 불렀거든) 노을 그리는 데 심취해 있을 적에 마음을 사로잡는 곡조가 들렸대. 어느 처자인가 고개들어 보니까 바다 저편에서 뭔가 반짝거리고 있더래. 처음에야 뭐, 해가 바다에 비쳐서 빛나겠거니 했다지. 퍽 듣기 좋은 소리라 해가 다 지고 어두운 밤까지 거기 있었더니, 그믐이라 물은 잠잠했는데 계속 반짝거리는 게 이리저리 흔들리더래. 소리가 밤바람에 묻혀 사라질 때까지 가만 서있었대. 다다미방 바닥에 누워서 이불을 덮었는데도 자꾸만 눈에 귀에 아른거리는 게 끔찍하게 답답했는지 다음날엔 평소보다도 일찍 바다에 나갔다더라.
한참을 돌아봐도 안 보이기에 그저 환영이었던가 꿈이었던가 다시 조개나 캐려니까 멀리서 뭐가 헤엄쳐 오더래. 대어라도 되는 건가, 잡아다 팔면 한 몫 챙길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조개 담던 망을 죄 비우고 기다렸는데 제 밤을 지세우게 한 그 반짝임이었다더라고. 글쎄, 얘가 집념이 워낙 강해서. 뭐 하나에 사로잡히면 계속 그것만 파거든. 바닷물 점점 깊어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들어갔다고. 미친 거 아냐? 바다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큰 차이인데, 죽으려고 환장했지. 숨이 턱턱 막히는데 잡힐 듯 말 듯 다가오는가 싶다가도 또 멀어지는 게 아쉬워서 계속 다가갔대. 잡힐 것만 같아서 손을 쭉 내밀었는데, 뭔가 잡혔지. 근데 바로 물에 빠져버렸다네, 바보같이.
정신차려 보니까 웬 사내가 물 뚝뚝 흘리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는데, 처음에는 너무 고와서 계집인줄 알았다지 뭐야? 게다가, 말하는 게 노래 같았는데 그게 또 귀에 아른거리던 그 소리더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또 바로 덥썩 잡아다가 당신 대체 뭐요, 하고 물었지. 희고 축축한 손가락이 입술을 눌러가지고 다른 말까지는 못 했다지만. 그 사내가 돌아가려하기에 고 가느다란 팔뚝 꽉 잡으니까 놀란 얼굴로 돌아보는데, 잘 보니까 위에까지는 사람인데 사타구니부터는 오색빛 영롱한 비늘이었다 하더라고. 그래, 인어였단 말이야. 영 허구는 아니었던 거야.
일단 잡아두긴 해야겠고, 그물에 가두자니 명색에 생명의 은인인데 이건 좀 아니다 싶으니까 뭐랬겠어. 내 그림 좀 그리게 여기 있어주면 안 되겠냐 그러지. 사실 본인도 안된다 하겠거니, 자포자기하면서 말했는데 또 그걸 알았다고 들어주더래. 이야, 그 뒤로는 맛층 얼굴 보기도 어렵더라. 조개같은 거 다 팽개치고 매일매일 하루종일 그림만 그렸다나봐. 죽었나 살았나는 알아야겠다- 하고 어찌어찌 집까지 찾아가서 겨우 만났는데 엄청 수척하더라고. 그래서 걱정되는 마음에 뭐라도 먹여야겠거니 집 안을 뒤져보니까 글쎄, 죄다 종이쪼가리더라. 근데 그게 또 엄청 환상적인 거야. 이거라도 팔아서 쌀 사드소, 라니까 어쨌는지 알아? 거 날카롭게도 뺐어서 자기거라고 절대 못 판다더라. 그래 그거, 아까 말했듯이 얘가 집념이 좀 강해야지. 욕심도 많거든.
나야 뭐, 저가 싫다는데 내가 무슨 참견을 하겠나 손 빼기로 했다고. 아직 죽지도 않았고 나름대로는 만족스럽게 살고있는 것 같으니까. 여기서부터는 나도 전해들은 이야기야. 아, 진짜라니까? 믿음직한 사람이 말해 줬다고.
맛층이 그 인어에게 홀리다시피 지내면서 여러 번 이름을 물었는데 인어는 결단코 비밀이라고 안 알려줫다더라. 그래서 뭐라더라, 스가? 정도로 부르면 된다고. 인어한테 어울리는 별명이지. 시원하고(すがしい) 청아한 미인(すがしめ)이라니. 그치만 맛층이니까, 포기 안 했어. 계속 말했지만 집념 엄청난 녀석이라니까. 앗, 이게 아니라 맛층이 굶어죽을 것 같으니까 인어가 진귀한 음식도 가져다 줬다나봐. 그걸 본 녀석 말로는 먹으면 먹을수록 맛층이 정신을 잃는것 같았다지만 목숨이라도 부지한 게 어디냐구.
끝없이 그리고, 그리고, 진주까지 빻아서 반짝이는 가루를 그림에 입히기까지 했대. 선물하면서 청혼 했다네. 같이 살자고. 인어는 잠깐만 눈 좀 감아 달라고 했대. 떠나가지나 않을까 불안했지만 오래 못 먹고 못 잤으니까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지. 그 순간 번뜩 생각나더래. 스가와라 코우시, 인어의 이름이라고. 입 밖으로 소리내서 부르니까 인어가 멈추고 올려다 봤어. 맛층이 눈 뜨니까 인어가 맛층의 그림자를 한쪽 발에서부터 잘라내고 있었다더라. 그거 있잖아, 인어는 영혼이 없어서 인간의 영혼을 훔치는 거라고...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맛층은 영혼의 반을 잃은 채로, 인어는 자기 자신을 잃은 채로 하나가 됐대. 인어들은 이름을 뺐기는 순간 그 사람의 것이 되거든. 나름대로 공평해진 셈이려나?
아, 진짜라니까. 못 믿어? 여기, 그 인어의 비늘 조각을 보면 너희도 생각이 달라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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