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력에 참여한 글을 다듬었습니다.
그 인어의 그림자는
아르니
이것은 어느 술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일본 북부의 바닷가에 조개잡이 청년 마츠카와 잇세이가 살았다. 마을에서는 괴짜로 이름났는데, 온종일 바닷가에서 지내면서 물 빠지면 갯벌에서 조개 캐고 물 차면 뭍에서 그림 그렸다. 수확이 많지 않아도, 그래서 돈을 적게 벌어도 자기는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늘도 파랗고 날씨도 쾌적했으며 볕이 따뜻해져서 벌과 나비도 눈에 띄게 늘고 있었으니 아마 5월이었을 것이다. 어느 노을지는 오후에 마츠카와는 해와 구름을 물감 삼아 바람으로 그린 하늘을 종이에 옮겨담는 데에 심취해 있었다. 깃털구름 한오라기를 마저 그려낼 무렵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냘픈 곡조가 울렸다. 어느 처자인가 고개를 들어 보니 바다 저편에서 반짝이는 무언가이기에 처음에는 늘 그렇듯이 지는 해가 바다에 난반사되어 생기는 빛덩어리와 새나 바다 동물 소리라고 생각했다. 출처 모를 곡조가 퍽 듣기 좋았는지 그림을 완성하고도 어두운 밤까지 거기 있었더니, 그믐이라 달도 없는데 계속 반짝거리는 게 이리저리 흔들리더란다. 파도에 작은 노래가 흐려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집에 돌아가서 다다미방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는데도 자꾸만 눈에 귀에 아른거리는 게 답답했던 모양인지, 다음날에는 평소보다도 일찍 바다에 나갔다.
한참을 돌아봐도 안 보이기에 그저 환영이었던가 꿈이었던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끔뻑거리는데 멀리부터 정체 모를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간을 좁히고 보니까 그것이, 틀림없이 전날 봤던 빛덩어리였다, 조개잡이 청년은 집념이 있어서 무언가에 사로잡히면 모두 내팽개치고 파고들기로 유명했던 터라 그를 발견해놓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바닷물이 점점 깊어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들어갔다. 바다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큰 차이인데, 죽으려고 환장한 게 아닐까. 이 이야기를 전해준 이가 첨언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 잡힐 듯 말 듯 다가오는가 싶다가도 또 멀어지는 게 아쉬워서 계속 다가갔다. 손에 잡힐 것 같았다고, 그게. 헛손질 헛발질 반복하다가 손을 내밀어서 움켜쥐었더니 물에 빠져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웬 사내가 물 뚝뚝 흘리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는데, 처음에는 너무 고와서 계집인 줄 알았다. 게다가 마디마디 노래같은 목소리가 가냘프고 애처로운 그 곡조와 꼭 닮았더라. 네는 뉘냐 물으니 희고 축축한 손가락으로 마츠카와의 입술을 눌렀는데, 미끄러운 게 흡사 미역 같았다. 사내가 돌아가려니까 마츠카와가 가느다란 팔뚝을 낚아챘더니 놀란 얼굴로 돌아봤는데, 오른쪽 눈 밑에 눈물점이 그렇게 요망할 수가 없었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머리칼이랑 피부는 진주같이 하얗게 빛나고 마른 몸 배꼽 아래부터는 오색 빛 영롱한 비늘이더랬다. 우리가 상상 속 이야기라고 치부해 왔던 인어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붙잡고는 싶고, 그물에 가두자니 명색에 생명의 은인인데 이건 좀 아니다 싶으니까 그림을 좀 그리게 여기 있어 주면 안 되겠냐 물었다. 말하면서도 안 된다 하겠거니 자포자기했는데, 정작 인어는 그를 흔쾌히 수락했다.
진줏빛 머리는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삐쳐있는 앞머리 말고는 하나로 모아 묶어 허리까지 늘어트려서 산호와 비취를 꽂았다. 귀 대신 자리한 아가미보다는 목선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이 눈길을 잡아끌었고 얇게 덮인 근육 위에 분홍색 유두를 찍어놓았다. 팔은 안쓰럽게 가늘어 부러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뜻밖에 튼튼히 붙어있었다. 갈비에는 뼈마다 진주를 촘촘히 박아두었고, 등에 울긋불긋한 문양이 있었는데 탁자볼락 두어 마리가 어지러이 노는 모습이었다. 다리 대신에는 화려한 꼬리가 길게 늘어져서 넓고 팔랑거리는 지느러미에 소라나 조개껍데기, 불가사리 따위가 붙어있었다.
마츠카와는 인어에 스스로 묶여 붓질했다. 수없이 감탄하고, 다른 각도로, 다른 자세로 여러 장을 그려냈다. 아침부터 밤까지 조명이 바뀌며 물감도 바꾸어가며 칠했다. 끼니를 거르기는 일쑤라 가끔 인어가 가져다주는 진귀한 음식을 먹었음에도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원래도 괴팍한 그였지만 이 시기에 만난 이들은 마츠카와를 정신 나갔다고 표현했다.
생업이었던 조개잡이도 관두고 그림만 그리니 요물의 저주에 걸린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누군가 그림을 사겠다고 했으나 펄쩍 뛰며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저만의 것이라며 역정을 냈다고 한다.
그는 인어에게 여러 번 이름을 물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었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제 옆에 잡아주고 수없이 불러주고 싶었다. 그러나 인어는 비밀이라고, ‘스가’라고 부르라고만 답했다. 수십 번 애원하고 가진 것을 바친대도 소용없었다.
인어가 축제에 초대했다. 섣달그믐 깊은 밤 가까운 섬에서 열리는데, 가지각색의 비늘을 가진 인어들이 어울려 노래하거나 보기 드문 장식품을 자랑하고 물에서 춤을 추는 동안 해양과 대지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이야기에 마츠카와도 솔깃했다. 본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오래 배가 고팠던 터라 사양하지 않았다.
청년은 그믐을 기다리며 진주를 빻아 물감에 섞어 그의 키만큼 큰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지금까지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림을 떠올리며 뇌리에 선명한 것을 묘사했다.
둘은 업고 업힌 채 바다를 가로질렀다. 모닥불을 피운 뭍에 닿자 정말 수십 마리의 인어가 모였다. 개중에는 스가처럼 인간을 데려온 인어도 있었다. 인간들은 하나같이 야위고 눈에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마츠카와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저들은 누구지? 마츠카와가 묻자 그의 인어가 미소 지었다. 사랑에 빠진 인간. 모래밭 사이로 난 물길로 인어들이 움직였다. 축제가 시작되었는지 재잘대던 소리가 멎으며 가운데의 커다란 모닥불이 밝게 타올랐다. 인어의 왕 정도로 보이는 이가 축사를 끝내자 무희들이 춤추었다. 물과 조개와 소라, 산호 등으로 만든 악기 소리가 피어났다. 심해주(酒)가 한 바퀴 돌았는데, 이는 그들 사이에서도 무척 귀한 것이라 했다. 이야기꾼이 재미난 시를 읊었으며 잘 모르던 인어들끼리도 어우러져 놀았다. 모두가 즐거운 웃음을 지어내고 나른한 술기운에 빠질 무렵 하나둘 따로 떨어졌다. 마츠카와의 짝인 스가도 얕은 해수를 어지러이 빙빙 구르면서 그를 불러냈다.
인어가 달게 속삭였다. 당신의 그림자를 나에게 줘. 사랑하는 그대의 어떤 소원이든 들어줄게. 부귀영화도, 미녀를 사로잡는 힘도 줄 수 있어. 마츠카와는 콧소리를 내고 말했다. 너의 이름을 알려준다면. 청년이 품에 소중히 넣어온 그림을 펼쳤다. 보아온 것 중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워 밤하늘 아래서도 빛나 보였다. 나의 짝이 되어 한평생 살자.
서로가 내건 제안은 어쩌면 저 자신을 담보로 한 거래였다.
아무도 들을 수 없이 그의 귓가에 저의 이름을 담은 인어가 마츠카와의 그림자를 왼쪽 발부터 잘라냈다. 기다랗게 늘어진 것을 팔에 둘둘 감아 반쯤 감겨 욕심에 빛나는 눈동자로 오른발을 핥았다. 저것만 잘라내면 이 영혼은 온전히 내 것이다, 손을 뻗으니 청년의 입술이 딱 소리내 떨어졌다. 스가와라 코우시.
조개 잡던 청년의 영혼을 둘이 나눠 가진 채, 인어의 육신을 인간에 빼앗긴 채 그들은 오래도록 서로를 탐하다가 바다 마을, 둘만의 별 아래서 파도에 스며들었다.
'2차 창작 > 하이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브스가] 여름, 얼음 (봄,열 외전) 01 (0) | 2016.07.10 |
---|---|
06/13 스가와라 코우시 2016 생일 축하! (0) | 2016.06.13 |
[카게스가] 봄, 열 (0) | 2016.06.03 |
[모브스가] #rt수만큼 바를정 스가와라 (0) | 2016.05.29 |
야마구치 타다시 (0) | 2015.04.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