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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하이큐!!

[모브스가] 여름, 얼음 (봄,열 외전) 01

by 아르니 2016. 7. 10.

여름, 얼음

 

아르니

 

 

아빠, 그냥 없었던 사람이 돼 주세요.

지금 죽어버리지도 말고, 이렇게 연명하지도 말고,

그냥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 주세요.

난 수술 시켜줄 돈 같은 거 없어요. 장례식 치를 돈은 더더욱 없고요.

사라져 주세요. 나한테서 없었던 사람이 돼 달라고…….

 

 소리 없는 기도를 마친 스가와라 코우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훌쩍거리거나 눈가를 비볐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었을까, 유리창을 넘어온 아침 햇살 아래 손을 모으고 간절한 얼굴로 아픈 아버지 곁에서 기도하는 청년의 모습은. 젊은것이 부지런도 해라, 병상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 야무지게 돈 벌어오는 저 희고 가는 것은 6015번 병실 환자들에게 상징과 같았다. 때로 딱한 마음에 끼니라도 챙겨야 한다며 천 엔짜리 지폐를 꼭 쥐여주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병원 공기는 숨 막혔다. 창문은 한쪽 벽면의 여닫이가 다인데 그조차 히터나 쿨러를 튼다고 공기 청정기에 의존한 채 환기조차 안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비좁은 방에서 다시 커튼으로 나뉜 작은 공간의 산소를 나눠 써야 했다. 병실 밖 복도는 링거를 옆에 끼고 느린 걸음으로 이동하는 환자나 두리번거리는 방문객-가장 소란스러운 건 거기 딸려온 아이들이다-으로 북적였고, 그 틈에서 소독약과 쇠 냄새를 실은 카트를 미는 간호사와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기까지 하려거든 신경을 바짝 세운 채 에너지를 소비했다. 어느 날 누가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곳이었다. 후각 아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그 냄새는 아마추어 작가의 상상만으로 이루어진 하얀색 소독약 병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일같이 오늘 살아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낮에는 일식당, 저녁에는 바, 주말에는 카페를 전전하면서 임금과 얄팍한 동정으로 생명을 이어나갔다.

 “코우시군, 오늘도 굶었어? 살 붙을 날이 없네. 이거라도 먹고 일해. 일하다 쓰러지면 내가 곤란해.”

 뒤에서 들러붙는 사장이 팔로 허리를 감아 그의 배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불쾌함을 눌러 담고 소바를 받아들었다. 달큼한 냄새에 토할 것 같지만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이러다 체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먹고 체한 적도 많았다. 밤중에 거품까지 토해내고서야 쓰러지듯 잠들어서 씻어내지 않은 위산에 입안이 헐어버리곤 했다. 그러면 출근했을 때 직접 바르면 된다는 걸 동료가 굳이 자기 손으로 약을 발라주었다. 짠맛이 나는 손가락으로 입안을 헤집다가 혀뿌리를 건드리는 바람에 울컥 눈물이 고이고서야 침 범벅이 된 중지를 빼내고 다음부터는 잘 헹구고 자라는 둥, 매번 이러는 것도 질리지 않냐는 둥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스가와라도 그러고 싶었다.

 일일이 화를 내기에 돈 버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잘리면 안 되니까, 다시 구하기도 어려우니까 견디기로 했다. 개같이 벌어서 한 달 치 입원비를 마련하고 입에는 풀칠만 했다.

 꽤 돈독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와무라 다이치와 아즈마네 아사히는 각자의 생활에 휩쓸려 졸업 후에도 두세 달에 한 번씩은 만나자던 약속조차 작년부터는 지키지 못했다.

 

 어쩌면 이리 사는 것보다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초여름 밤 하현달 섞인 바람은 서늘했다. 주말에 아르바이트하는 카페가 로비에 붙어있는, 모 기업의 14층짜리 오피스 빌딩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리도 크기도 작아져서 아무것도 아닌 모형 도시 같았다.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사람들, 2차선 도로에 클랙을 울리며 정체된 자동차를 마음대로 들어다 옮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신이 있다면, 그가 보는 세계는 이런 걸까. 그렇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토록 무심할 리가 없었다. 신에게 이 세계는 심심하면 가지고 놀다가 싫증 나면 쓰레기에 묻혀 먼지 쌓여도 내버려두는 싸구려 장난감일 터, 중요했다면 이 우주를 이루는 부품 하나하나가 병들고 괴로워하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곧 저기로 떨어질 것이다. 바닥에서 바닥으로 한걸음 딛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면 무섭지 않았다. 살아있는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거나 저의 피와 살 가운데 잠들거나, 거기서 거기. 치열하게 팔다리를 휘저어 살아있어 봐야 지치고 괴로울 뿐이지 짧은 공포심을 제물삼아 저를 지워버리느니만 못했다. 예전처럼 제가 사라지거든 심장이 찢어져라 슬퍼할 인연 같은 것도 없었으니 죄책감도 흐렸다. 흰 점 하나 사라진대도 지구는 여전히 24시간마다 자전하고 365일마다 공전하리라.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찌그덕거리는 문은 잘 닫히지도 않아 여러 번 쾅쾅 당겼다 밀어서야 제자리를 찾았다. 어둠에 가린 사람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입에 물고 작은 불씨를 옮겼다. 그러고 보니 빌딩 불이 다 꺼지지는 않았었다. 담배 피우러 올라온 건가, 내 마지막을 지켜보는 건 저 이가 되겠구나. 누군가 본다고 해서 지금 죽으려는 계획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제 죽음을 몇 분 먼저 목격하는 게 무슨 대수랴. 팔로 시멘트 난간에 몸을 지탱하고 다리를 올리려고 했다.

 “이름 모를 청년, 난간에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걸 모를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알면서도 행동하는 사람에겐 의도가 있다는 걸 모를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올라간 채로 시간 끌어봐야 망설임만 늘겠지, 다시 바닥에 발을 붙였다. 스가와라보다 한 뼘쯤 작은 남자였다. 셔츠 소매를 걷어올려 드러난 팔뚝 선이 매끄러웠으며 왼쪽 손목에 비싸 보이는 시계를 착용했다. 넥타이 중간쯤의 고정용 핀에 적은 빛이 반사되었다. 이마가 드러나는 머리칼은 아침에 단정하게 넘기고 나왔다가 시간이 지나서 흔들린 걸까, 밤하늘 아래서 파악한 건 그 정도였다.

 “그렇담 더더욱 보고만 있으면 안 되지.”

 다이치와 츠키시마의 중간 정도 되는 음성을 내면서 바로 옆에 기댔다. 고교생? 대학 중퇴했는데요. 남자는 세 손가락을 펼치고 두 집게손가락으로 잡은 담배를 버릇처럼 잘근거리다가 내뿜었다. 스가와라가 미간을 좁혔다.

  “아오네 요루.”

 내 이름이야. 잠시 곱씹어보자면 아오네, 고교 배구부에서 활동할 적에 상대 학교 곰 같은 미들블로커 성씨도 아오네였는데. 한자가 다르려나. 아오네가 물었다. 꿈은 없어? 없어요. 나도. 덮쳐오는 정적을 연기에 섞었다. 그냥 돌아갈까, 죽어도 월급은 받고 죽는 게 나을까. 돌아가려는 스가와라를 붙잡았다. 실연? 이지메? 빈곤? 담뱃재를 허공에 털었다. 어차피 곧 죽을 건데 시시콜콜 말해줘도 상관 없을지도. 어쩌면 동정표라도 받을 수 있을까, 돈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빚더미에 쌓인 거,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득달같이 벌어서 빚 겨우 갚았나 싶더니 아버지가 쓰러져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거, 아르바이트로 겨우 밥만 먹고 사는 것을 털어놓았다. 길고도 짧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담배가 반쯤 타들어 갔다.

 “이제 갈래요. 죽는 건 다음에 해야겠네요.”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오네가 담배를 발로 짓이겼다.

 “알바 그만두고 나한테 연락해. 지금보다는 나은 생활, 보장해 줄게.”

 개인 번호를 받았다. 뭘 의미하는지는 잘 몰랐다.

 

 먼지투성이 아침에 새가 지저귀었다. 아기 새가 솜털을 벗고, 젖을 뗀 고양이가 사냥을 시작하는 시기였다. 서로는 살아가기 위해 기를 쓰고 피하고, 어떻게든 잡아먹을 것이다. 보는 사람으로서 아기 새가 멋진 날개깃을 얻기를 바라는 한편 새끼고양이도 어엿한 개체가 되기를 바라지만 어느 한쪽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쪽이 죽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토요일 아침에는 몸이 무거웠다. 온종일 잠만 잘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불에 가두고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까지 연체된 월세를 내지 않으면 방을 빼야 한댔다. 받은 번호에 연락해봐야 할까, 뭔가 도와줄 것 같았지.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을 무턱대고 믿을 수도 없었다. 쉽게 찾아오는 기회는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다. 다이치였던가, 어쩌면 아사히였을지도. 아, 배고프다. 병동에 가서 아침이라도 얻어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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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편을 작성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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